기술이 어떻게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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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582 · 2026-06-24 14:34:09 · 53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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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
나는 태어나고 보니 야후 코리아가 있었고, 다음이 있었고, 네이버가 있었던 시대를 살아 온 2002년생의 평범한 뜨내기이다. 정치 성향은 딱히 한 쪽 성향이 아니고, 흔히 말하는 양비론에 굳이 맞춰 주자면 빨간 당, 파란 당, 둘 다 아닌 당을 모두 찍어 보았다. 그리고 나의 세대는 인터넷과 인스턴트 정보에 조기 노출되었다. 5살 때부터 혼자 인터넷에 들어가 프로그램을 깔며 시작하여, 개발자 커뮤니티를 아직도 들락거리는, 어찌 보면 '인터넷 문화에 그득그득 물든'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본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내가 관찰한 웹
필자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웹을 접한 것은 의외로 이른 초등학교 시기이다. 이전까지는 소프트웨어 설치, 정보 검색 등만 하던 필자가 처음으로 '사람들의 글을 읽고, 반응을 남겨 본' 것을 시점으로 잡자면 말이다. 그 때에 어떤 말들이 유행하였는지 보면 현대보다는 다층적인 면도 있었지만,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크다.
2010년대에도 특정 분야의 매니아 문화(예를 들자면 생물 관찰 모임이나 KLDP와 같은 곳들)는 비교적 성숙하고 긴 토론이 이루어지며, 이것은 현대 웹에서도 상당 부분 이루어진다. 이러한 곳에서는 익명의 프랑스 개발자가 내 소프트웨어의 버그를 제보하고, 젊은 인도인 엔지니어가 나의 학습을 멘토링하고, 나 역시 생면부지의 폴란드 엔지니어에게 코드 패치를 제안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화는 거의 안부 인사, 학구적 토론, 그리고 감사 인사로 끝나고, 한낱 몰락해 가는 지방 도시의 취업 준비생이 유명한 현업 엔지니어로부터 '이 드래프트를 사용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수 있는 수평성이 두드러진다. 그런 만큼이나, 이곳은 훈훈하고 인간적인 일화가 가득하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주로 2000-201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런 동호회 분위기가 마치 2010년대의 분위기였던 것처럼 단 10년 만에 낭만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시절에도 황당한 혐오들은 아주 많았다. 예를 들면, 된장녀/김치녀 논쟁은 현재의 여성 비하 밈에 그대로 대입되고, 10년대 후반에 떠들썩했던 메갈리아 역시 말이 미러링이지 그러한 패배주의적 혐오를 그대로 복제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실을 돌아다니면 이상할 정도로 거친 말을 쏟아 내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대부분 '에이, 된장녀?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라고 했고, 지금도 '에이, 한남 한녀? 그런 갈라치기를 누가 믿어요?'처럼 관심이 없거나, '저는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보는데, 그런 거 자꾸 보면 건강에 나빠요'라는 말을 해 주는 "정상인들" 뿐이다.
가장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극단은 점점 더 심화되고, 사회는 개선되어도 극단주의 집회나 포털 사이트의 표현은 줄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하고 글을 남기는 사람들은 소수 중에서도 소수임에도 뉴스에서는 그 보기 드문 '일간베스트 이용자'를 계속해서 보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소수의 색깔이 갈수록 더 강해지고, 이제는 티 내지 않던 사람들이 현실에서 티를 내다가 핀잔을 듣기까지 하는, '새어 나오지 말았어야 할 것이 새어 나오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는 점이다.
당장 나만 해도 학교에 다닐 때, 실제로 '디시인사이드'의 모 극단주의 갤러리를 하는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여러 번 있으며, 동기나 선배들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자 그제야 수습하려는 꼴부터, 신념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람을 본 적이 꽤 된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그들이 소수임에도 왠지 거리에는 부쩍 '맞불 집회' 빈도가 늘어 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순기능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역기능으로 뒤바뀌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빠르고 쉬운 정보 전달, 그러나 사실만 번지는 건 아니지
인터넷을 이용하면 빠르고 쉽게 소식을 알 수 있다. 내 구글 뉴스와 RSS 신문 피드에는 조선일보, 한겨레, 경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다양한 성향의 일간지들이 꽂혀 있고, 수백 밀리초 만에 뉴스 기사는 날아와 꽂힌다. 뉴스는 신선하고, 칼럼은 날카롭고, 앵커들은 눈앞에 있는 듯 말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빠르고 쉽다는 특성을 공유하는 이상, 협잡질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패배 의식 투사 역시 매우 쉽게 이루어진다. 자신의 불행함을 '기성 세대 때문' 혹은 '여자 때문', '남성의 폭력성 때문'이라며 장황한 정당화를 써 낸 글도, 만약 우연히 조회수의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너무 쉽게 들어온다. 비슷한 패배 의식을 가진 종자들이 모여서 한두마디 덧붙이고, 또 살을 덧대다 보면 익명의 다수가 저작한 '나의 투쟁'이 완성되어 있다. 더 소름끼치는 것은 이것을 집필한 것은 뒤틀린 개인 '아돌프 히틀러'도 아닌, '21세기의 계층과 국적, 성별도 모른 무명씨'들이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부자부터 거지까지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을 수 있는, 가공의 선동가는 조건만 맞춰지면 언제나 생겨난다는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도 가고, 발 없는 욕설은 만 리도 간다
신문 사설과 같은 차분한 텍스트, 그리고 욕설로 범벅된 텍스트. 더 기억에 잘 남는 것이 후자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욕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수많은 연구들은 욕설을 자주 할수록 어휘의 폭이 좁아지고, 사고는 고착화되며, 심지어 욕설은 흥분과 충동에 근접하기 때문에 쉽게 각인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 연구자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으며, 무분별한 '선플 캠페인'이 효과가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비판의 목적도, 저항의 명분도 없이 계산하지 않고 남발하는 욕설이라면 쉽게 사고를 오염시킨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신문 기사에서 다룬 수많은 사건사고들은 생각보다 빨리 잊힌다. 반면, 욕설과 조롱으로만 이루어진 글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퍼져 나간다. 그리고 글들이 불어나는 과정을 보면, 꽤 일관된 패턴을 가진다.
처음에는 개인의 불편한 상황, 가정사 등을 인터넷에 구구절절 늘어 놓고, 함께 분개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고, 익명의 사람들이 대화하다 좋지 않은 맥락으로 빠져 버리는 순간 거대 담론으로 원인이 잘못 특정된다.
지역, 국가와 같은 대목을 다루고자 하지만, 악성 커뮤니티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논할 토양이 되지 못한다. 조심스럽게 논의되어야 할 지역, 국가, 성별과 같은 주제는 밈의 재료가 되고, 참여자들은 도리어 더 자극적인 밈이 태어나고야 말기를 기대한다. 이후 누군가는 단순히 따분함을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는 선동하기 위해서 '악성 밈'을 만들어서 돌연변이적인 문화를 만들고 확산한다. 이미 다루는 내용은 놀이라기엔 지나치게 부도덕한 범위에 도달했음에도, 참여자들은 여전히 관성적으로 놀이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세월호 어묵 사건'이라던가, '한국 종말론', '전라도 대 경상도'(이것은 필자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굉장히 설움 섞인 언급이기도 하다)와 같은 헛소리들마저 우리에겐 모욕이어도 그들에게는 놀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 생긴다.
필자가 의외로 좋아하는 일본의 속담 중,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다'를 골라 보겠다. 보통 이 속담은 풍자적으로 사용되거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사용되는데, 사실 냄새나는 것을 클린 룸처럼 완전히 격리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냄새나는 것을 어찌할 바가 없으니 장독 뚜껑이라도 떼 와서 급한 대로 하수구를 막아서, '조금이라도 냄새가 덜 나게 하자'고 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터넷의 경우에는 의도치 않게 '냄새 나는 장독 안'인 동시에 '마우스 몇 번으로 뚜껑이 열리는 항아리'가 된 측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터넷은 항아리 안에서 더 고이고, 썩고, 파리는 더 몰려드는 공간이 되어, 어쩌다 유입되는 사람들의 호기심도 금세 호전성으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에, '항아리 뚜껑 두 장'을 덮을 것이 아니고 원물이 빠져들 여지를 덜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원물이 어떻게 줄어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냄새나는 항아리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가장 많이, 그리고 쉽게 호출되는 것은 정부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 맞춰 정부는 각종 신고 체계와 규제 장치를 마련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구조적 모순의 해결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원물을 줄이기 위해서 정말로 정부가 나서야 하는가? 이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치 장기를 둘 때 아까운 말부터 먼저 내보내는 것이고, 체스를 할 때 킹부터 전진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물을 줄이기 위해 시민 단체에 돈을 더 주어야 하는가? 불가능하다. 시민 단체가 정부로부터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는 이상 그것은 더 이상 '시민' 단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썩은 것을 도려낸다'는 명분 하에 양비론으로 나아가 매카시즘, 혹은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극단주의로 전복해야 하는가? 우리가 잡고자 하는 그 지독한 원물이 바로 그 양비론이다. 반공 혹은 공산주의, 영남 혹은 호남, 남성 혹은 여성. 이것은 매우 지루하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싸움이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는 정부라는 조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할수록 정부가 감당해야 할 영역이 끝없이 커진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더 큰 문제를 감당하려고 할수록 양비론과 극단화는 심해진다. 반대로 정부가 개입의 범위를 줄이고 사회의 자율성을 보장할수록, 사회는 문제를 스스로 조정하려는 힘을 되찾는다. 정부가 칼을 빼 들면, 대상은 논쟁이 아닌 수사가 필요해지고, 정부가 주목하면 대상은 현상이 아닌 수단이 된다. 정부가 손을 뻗으면 그 소유관계가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 소유는 여당이 어디냐는 언급과 함께 또 다른 색깔론을 불러 온다.
지금 중시해야 할 것은, 한국은 경제 성장기가 아닌 소강기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지금 주변국의 심각한 경제 둔화를 보면, 2000년대 한국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정치인은 완벽할 수 없으며, 시민들은 정치 조직을 감시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최근의 재평가 등을 보아도 이웃 나라들조차 '아베가 문제다', '메르켈이 문제다', '보리스 존슨이 문제다'와 같은 맥락으로 치환되고, 마치 그의 잔당들만 뿌리 뽑으면 국가의 위신이 살아날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다. 나의 경우 이것은 정치인이나 집단을 소거한다고 나아갈 문제가 아닌 '그렇게 되기 취약한 구조'가 발생함에 대한 것이 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시로, 경제 안정기에 가장 아쉽게 낀 부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사실 노 대통령이 쏟아지는 경제적 모순과 성장세 둔화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시기적인 필연 역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도 성장기의 10%대 성장을 기억하고 바라고 있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대통령 때문이다'라며 압박했고, 이후 언급할 일간베스트 저장소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꽤 급진적이었던 비리 수사와 엮어서 경제도 못 하고 비리도 저지른 정치인이라면서 조롱하였다. 물론, 정책 실패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용인되어야 하며, 사후에도 평가와 논의는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비판이란 명목은 사라지고 개인에 대한 조롱으로 변질된 문화는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 세대적 갈등을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왜, 언론은 여전히 '큰 정부의 향수'를 가지고 몽니를 부려야 하는가?
최근 정부의 '유해 사이트 규제'에 대하여
정부에서 '일간베스트 저장소'를 필두로 하는 유해 사이트들에 대한 전면적인 차단을 검토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고, 그에 대한 밑거름 작업으로 HTTP 451 코드를 통한 '정부의 요청에 의한 차단'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여론과 맞지 않는 유해 집단을 차단하기 위한 좋은 수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정말로 찬성하는 것은 정부와 기관의 본성과 음성적 사이트 양쪽의 본성을 모두 이해한 것이 아니다.
음성적 사이트는 법적인 근거로 차단을 당하더라도 서버 이전부터 토르, IPFS까지 갖가지 방법을 통하여 숨어 든다. 그 말은, 사이트 A에 대한 썩은 뚜껑을 정부에서 나서서 한 겹 더 씌운다고 해도 항아리는 새로운 곳에서 썩힐 원물과 '이미 썩은 원물'을 들고 다시 자료와 함께 '백업'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선의를 가지고 옮기면 또 차단, 옮기면 또 차단하던 정부는 어느 순간 지쳐서 추적을 놓게 될 가능성이 크다. 공공기관과 정부는 너무나도 비대해서, 마치 체스의 킹처럼 낑낑대며 옷자락을 감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뭔가 덮기 위한 뚜껑은 남았고, 정부의 가치에 반하는 목소리는 언제나 남아 있다.
이제 많은 지도자들이 '편의'를 위해서 무엇을 생성할까? 반드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역사적인 정책 변화를 보면 이 순리는 이렇게 흘러간다.
지도부는 언론도 시민도 모르는 새, 항아리라는 함정에 걸리는 사람들만을 뒤진다. 함정에 걸린 주체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객체이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정적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지도부는 항아리 뚜껑을 덮기 위한 명분을 만든다. 항아리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생쥐의 몰골을 부각하며, 사람들이 항아리 안이 냄새난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그것을 행동에 옮긴다.
이것은 미국의 매카시즘 역시 그 유명한 오펜하이머마저 '사회주의 연관 활동'을 이 잡듯 뒤진 일이 영화로까지 나왔으며, 소비에트의 일부 우주 영웅들에게까지 감행된 '기록 삭제' 처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물밑 작업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점은 지금은 자칫 냉전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며, 아슬아슬하게 두 세력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타고 있는 '조용한 긴장'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시대가 도화선을 켜서 이것이 남용되기 시작하면 '정부가 종북이라고 하면 종북'이 되는 것이고, '정부가 극단주의라고 하면 극단'이 되는 여당 주도의 붕당 정치가 먼 과거의 얘기로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썩은 것을 막는다는 참 목적은 달성하지도 못한 채, 정적의 칼날을 거두는 방패만 되는 셈이다. 비슷한 예로, 미국도 4chan과 같은 '아메리카판 일베저장소'가 있지만 막상 규제를 해 보려는 흐름은 한국보다는 미미한 편이다. 미국과 같은 국가는 인구 규모가 크기 때문에, 정부는 수억 명의 이해관계를 동시에 조정하는 위치에 놓인다. 놀라운 것은, 미국은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수치화된 국가이며, 때로는 한국보다 점수가 낮을 때도 빈번하다. '미국은 자유의 보루이며 자유 시민들이 규제를 거부한다'는 서사는 미국을 단순히 '1세계 수장'으로만 판단해 버린 이상향이 투영된 시선일지도 모른다. 비대한 정부가 사이트에 대한 일방적 재판권을 갖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시민들은 4chan이 음성적 사이트임을 알아도 이를 일부 단체의 논쟁 이상으로 확대하려 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이것 역시 하나의 선순환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사례는 규제 여부는 많은 경우 체제의 우수성보단 상황의 특수성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작은 국토, 중간 규모의 인구 수를 가진 한국, 특히 민주화를 직접 일구어 낸 한국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피 흘려 얻은 것이 이 작은 나라에서 어디로 가겠냐'는 안일함이 나쁘면 일단 막자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는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에는 광주를 필두로 전국이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쟁취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한국이, 불과 몇십 년만에 '이상한 애들이 이상한 애들 막으려 하네, 별로 나랑은 상관 없는 얘기지만...'과 같은 판단을 하게 된 것은 오히려 쟁취 후의 안도감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의 자유 아래에는 교과서 몇 페이지로 담기 힘든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생각할 거리
인터넷, IPFS, Tor, 모두 선의에 의해 시작된 기술이지만, 사람이 모이고 집단이 형성되는 순간 그것은 기술 이상의 맥락을 지니게 된다. 혹자는 기술자는 처음부터 관리 가능한 기술만을 만들고, 기술의 보급 범위 자체를 제약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혹자는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우려하고 기술적인 해법을 포기하는 것은 기우라고 말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기술이 죄라고 말해야 했을까? 아니면, 기술자도 기술도 아닌 사회의 생리 작용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비고
그래서, 너는 일간베스트 같은 것에 찬성하는 것이냐, 하고 물으려는 독자가 있다면 글을 조금 잘못 읽었다고 생각한다. 내 세대는 처음으로 극단주의자 패거리 때문에 사투리를 쓰기 두려워진 세대이다. 내가 고향 말을 쓰는 것조차 오해를 살 수 있게 된 것은 그들 때문인데, 그들을 싫어하면 내가 더 싫어했지 타지 사람보다 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