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사회 구성원'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by gg582 · 2026-07-20 09:37:20 · 33 views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와 사회적 자아, 법적인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아버지의 입장은 "인간이 사회적 규범과 통념에 따라 행동하고 개인의 사심을 버리는 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라고 정의하였으나, 나의 입장은 "현대 사회에서의 수많은 법적 관계는 어짊이나 근본적인 인륜보다는 기능하기 위한 도구일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현대 사회가 덕치를 이룬다고 볼 수 있는가?"를 계속하여 고민하였다.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주제가 있다. 이웃 나라 태국의 코코넛 농장에서는 원숭이와 '사회 계약'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놀랍게도 일방적 착취가 아닌 계약 말이다. 농장주는 원숭이 집단에게 노동량만큼 바나나와 음식이라는 급료를 주며, 원숭이의 짧은 집중력까지 배려해서 휴식 시간에 의자와 그늘, 간식을 내어 준다. 원숭이는 노동의 대가로 음식과 여가, 나아가 무리의 안전까지 보장받으며, 일을 잘 하는 원숭이는 무리에서 더 나은 위치를 점하기 쉬워진다. 숲의 원숭이는 자발적으로 마을의 원숭이로 계약하였으며, 합당한 조건이 어겨지더라도 명성과 안정을 보장받는다. 고용주는 원숭이의 이탈을 막기 위해 더 나은 간식과 큰 그늘막을 제공한다.

현대 사회는 더 높은 명성을 얻은 사람이 명성이 낮은 사람에게 급료와 점심 시간을 제공한다. 고용주는 노동량과 비례하지 않는 급료 테이블로 수치를 환산하여 주되, 직급에 따른 안정적인 고용과 조직 내 명성을 제공한다.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로 물질적 안정, 명성, 그리고 배분된 권위를 받는다.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고용주와 계약하였으며, 고용주는 노동자의 이탈을 막기 위해 제시된 조건의 열화를 제한하며, 근속 년수에 따라 대가를 키운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인격적인 수준과 형편을 고려하지 않으며, 기능적으로 변동성이 적은 노동자에게 더 나은 조건을 약속한다.

그렇다면, 이 때 두 고용주가 인간과 짐승 간의 긍정적인 차이를 짚어 낸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거꾸로 원숭이가 비인간 피고용 대상이라고 해야 하는가?

바나나와 지위를 물질적 약속과 명예로 환원하면, 놀랍게도 원시적인 계약을 위한 조건이 성립한다. 그러나, 우리는 원숭이를 구성원이라 부를 때 員(소속된 '주체'를 의미하는 한자)이라고 해야 하는가, 猿(객체로의 '원숭이'를 의미하는 한자)이라고 해야 하는가?

첫째로, 구성원의 정의와 사람의 정의가 분리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성격이 갈린다. 아버지의 판단은 근대 사회 계약론을 기반으로 하고, 동양적으로는 구성원의 정의가 사람의 정의 안에 포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통적인 유가'에 가깝다. 이러한 분파들에서는 구성원이라는 것은 사회적 자아 안에 포괄되는 개념이며, 사람의 정의 안에 사회적 자아가 당연히 포함되기 때문에 원숭이는 구성원이 될 수 없으며, 공장의 비품과 같이 '관리되는 객체'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판단과 맥락은 사회 구성원의 신뢰를 돈독하게 하며, 좋게 말하면 성실하게 근로하게 하고, 나쁘게 말하면 근로하는 동안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판단을 상실하게 한다. 그러나 사회적 자아가 항상 '인륜'에 속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반대 역시 아니다. 그래서 '사회적 자아'로부터도 '구성원'이라는 개념을 독립적으로 빼야 한다는 입장과 그 반대의 입장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상호 보완하게 된다.

좋은 예시는, 윤리적 경영을 하는 고용주와 그 직원들이다. 고용주는 자신의 비즈니스가 사회적 환원과 경제적인 이윤 모두를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판단하며, 직원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하기 위해 더 나은 환경, 직원 간의 유대, 안목의 다각화를 지원하며 부하들이 공부할 수 있게 지지한다. 평범하게는 책과 학습 자료를 지원해 주는 것부터, 아주 큰 일로는 회사 단위의 세미나 참석이나 휴가 승인이 있을 것이다.

나쁜 예시는, 상사가 '성립 여부'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이는 경우이다. 노동자는 주어진 지시에 대해서 일정한 근로를 수행하였고, 수행분에 미치지 못하는 사항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심사자가 갑자기 '일정한 근로의 기준은 나의 입장에서는 받은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던가, '일정한 근로의 기준은 아이를 갖지 않고 평생 일하는 것'이라고 기준을 멋대로 늘려 버리는 순간, 예상한 범위를 근로한 노동자에 대한 보복이 가능해진다. 좋은 고용자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모순 상황이 '근로 독려'로 승화되지만, 나쁜 고용자의 기준에서는 '인격 모독'과 같은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더 심한 예시로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집단과 그 구성원들이다. 아주 가까운 상흔으로는 일본 제국이나 나치가 있다. 엔진 회사들은 타국을 침탈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기 위해 기계와 약품, 보급품을 차출하고, 차출된 인원들은 '급료를 받았기 때문에' 응당 주어진 일을 수행한다. 그 결과의 양산품은 조선을 멸망시켰고, 유대인을 탄압하였고, 남의 나라 도시인 남경에서 약자들을 짓밟았다.

좋은 예시에 대해서는 좋은 지도자가 좋은 집단을 이끌고 함께 사회에 이바지하는 동인(同人)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사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체로' 이런 가치를 지향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나쁜 예시를 보면 사회는 '급료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조직이 변질되었더라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미덕이 된다. 물론 거부권이 상당히 축소된 이런 사례에 대해 개인에게 물을 수 있는 책임은 제한되지만,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 침략 물품에 대한 생산은 '잘한 일'이 되어 버린다.

만약 구성원이 '기능하는 합의 관계에 따라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며, 사회에서 사람으로 가져야 할 역할이 '윤리를 판단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고, 기능하지만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수행을 거부할 능력이 있는 주체'가 된다면 일견 좋아 보인다. 이 상황에서 원숭이는 구성원이지만 사람은 아니고, 판단 주체이지만 판단 기준은 흐린 것으로 잘 매듭지어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관점에도 몇 가지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많은 것은 도가와 노장사상이 비판받은 까닭과 겹친다.

좋은 예시에 대해서는, 극단화되는 집단 가운데서 구성원은 계약을 불이행할 의무가 선행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침략 무기를 만드는 직원은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 되고, 침략 무기를 만드는 것에 대해 외부에 알린 직원은 '내부고발자'나 '근태불이행'이 아닌 '우선하는 역할을 잘 판단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만으로 멈췄다면 국가나 지배 구조는 애초에 등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쁜 예시에 대해서는, 조직 내의 입장 차이에 대해 필요한 근로를 하지 않는 경우이다. 조직의 리더가 법적인 권리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내부 판단 실수를 하였을 때, 이 입장에서 노동자는 '기능에 실패한 조직에 대한 근로 거부'를 할 수 있어져 버리고, 역설적으로 이 입장에서는 진짜 내부 고발이나 근태불이행을 잡을 수가 없어진다.

더 심한 예시로 가면, 이것은 대규모 조직 및 국가관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논리가 자칫 확증 편향으로 이어지면, 구성원에게는 '조직의 독려를 사사건건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비약할 수 있으며, 이는 대규모 조직에서 장기적으로 눈덩이같이 불어나는 부작용을 불러 온다.

놀랍게도, 중근세와 달리 근대 국가부터는 두 입장의 좋은 예시와 나쁜 예시가 모두 국소적으로 등장한다. 첫 관점의 부작용이 거시적으로 등장하는 와중에도 둘째 관점의 부작용이 게릴라성 조직에서 끝없이 반복되고, 첫 관점이 완고한 사람들은 둘째 관점을 '야만인의 논리'라고 하며, 둘째 관점이 완고한 사람들은 첫 관점을 '순종에 길들여진 전체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를 살아가는 과정에는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이 항상 좋은 판단이라고 말할 근거가 부족하다.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구조는 역설적으로 '거동하는 개마무사'라고 할 수 있다. 유례 없는 평화와 풍요를 누리는 21세기 현재에 사회 구조는 더 격동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병법서에서 鼠頭牛首(쥐의 머리와 소의 머리)라고 한다. 작고 빠른 무기로 자신을 공격할 때는 재빠르고 약한 쥐처럼 몸을 움직여야 하고, 크고 느린 무기로 자신을 공격할 때에는 느리고 강한 소처럼 몸을 움직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현대 사회에서 두 관점을 유연하게 전환하며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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