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철학서 일주서의 몇 구절들과 비판적 독서

by gg582 · 2026-09-06 15:25:45 · 9 views

民生而有欲, 無度則亂. 度生於義, 義生於理, 理生於正, 正生於天.

백성은 나기를 욕망이 있어, 법도를 정하지 않으면 분란이 난다. 법도는 의로움에서 태어나고, 의로움은 이치에서 난다. 이치는 바름에서 생기고, 바름은 하늘에서 난다.

이는 본래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백성의 어지러운 현실에서 거꾸로 짚어 올라가 마침내 하늘의 궤도에 닿는 형국이니,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이치를 헤아리는 후천팔괘의 순환과 같다. 정통 주자학에서는 이것이 선천팔괘이며 상나라 후기의 어지러운 현실을 주 문왕이 구원한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실제 문왕의 투쟁은 이상적이고 인자한 군주가 부드럽게 상나라를 녹여낸 것과 다르다는 것은 고전에서도 인정한다. 옥고를 치르는 중에 인간 세상의 역학 관계와 원리를 파악하고, 어지러워진 세상이 자신의 대의를 따라 주기를 바라며 현실을 구제하려 한 그것은 하늘의 이치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변화무쌍한 현실에서 유일한 이치를 잡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로 서경에 이르기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 하여 중용의 자세를 지키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선천적이며 선험적인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고 하면 어째서 無稽之言勿聽, 弗詢之謀勿庸라고 하며 황당무계한 말을 듣지 말고, 충분히 상의하지 않은 계책을 쓰지 말라고 하였는가? 이는 변화무쌍하고 하늘의 이치를 알기 힘든 현실에서 그 한결같은 도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를 맑은 물에서 낙엽을 걷어내고, 거울에서 먼지를 터는 명경지수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저분한 잡석들 사이에서 옥을 찾아 내어 다듬어 쓰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言而弗行, 則民不服. 謀而弗遂, 則功不成. 賞不當功, 則民不勸. 罰不當罪, 則民不畏.

말을 하고서 행하지 않으면 백성이 불복하며, 도모하고서 이루지 않으면 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이 공에 마땅하지 못하면 백성이 힘쓰지 아니하고, 벌이 죄에 마땅하지 못하면 백성이 경외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 상과 벌이 서로 꼭 맞물려 떨어지지 않으면 음과 양이 제 자리를 잃고 어긋나는 괘상과 다를 바 없다. 이 역시 인간 세상과 사람 사는 이치가 선험적이고 이상적인 법칙대로만 되지 않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사상적 불일치로 인해 고려, 그리고 송대 주자학에서는 일주서를 위서로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사회가 그렇게 이상적으로 돌아간다기에는 농본주의적 모델도 민주주의적 모델도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 부분이 크지 않은가?


德之所加, 雖小必大. 怨之所聚, 雖寡必衆.

덕이 더해진 것은 작더라도 반드시 커지고, 원망이 모인 바는 적더라도 반드시 많아진다.

덕이 퍼져나가는 것이나 원망이 엉겨 붙는 것이나, 작은 싹이 자라나 끝내 크게 번지는 거동 자체는 매한가지이니, 주역에서 일컫는 양의(兩儀)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서도 같은 이치로 굴러가는 것과 같다. 덕을 쌓아도 원망을 그만큼 사면 뜻대로 잘 되지 못하고, 원망을 사도 충분히 덕으로 갚으면 용서받지 못할지언정 다시 원망을 살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태평성대라던 주나라도 결국 마지막에는 분열되어 여러 국가로 쪼개졌고, 각 소국들마다 말 하나 노래 하나가 모두 달라졌다. 제후의 법도는 주의 법도와 달랐고, 서주의 청동은 동주의 청동과 같지 못하였다. 마지막에는 동주 역시 하나의 소국으로 전락하여 흡수되어 사라졌다. 동아시아에서는 고대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거나 극형으로 원한을 사는 경우가 잦았다. 고대 동아시아의 순장부터, 신라나 일본의 고중세의 성곽에서 나오는 인신 공양과 같은 것이 정말로 원한이 되지 않았겠는가? 빼어난 인재 몇에 기대어 내부적인 병폐와 권위의 혼란을 덮던, 개항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말기 조선이 어떻게 수탈당했는가?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쌓이니 결국 나라는 변하고 제왕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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