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서 도훈해 편에 대한 조금은 현대적인 나의 생각

by gg582 · 2026-09-06 15:50:24 · 9 views

天生民而制其度, 度小大以正, 權輕重以極, 明本末以立中, 立中以補損, 補損以知足, □爵以明等極, 極以正民, 正中外以成命, 正上下以順政, 政以內□, □□自邇, 彌興自遠, 遠邇備極終也.

하늘이 백성을 내고 그 법도를 정하였으니, 작고 큰 것을 헤아려 바르게 하고, 가볍고 무거운 것을 저울질하여 기준을 세우며, 근본과 말단을 밝혀 중심을 세우고, 중심을 세워 덜어낸 것을 보충하며, 덜어낸 것을 보충하여 족함을 알게 한다. 벼슬로써 등급과 한계를 밝히고, 기준으로 백성을 바로잡으며, 안과 밖을 바로잡아 명을 이루고, 위와 아래를 바로잡아 정치를 순조롭게 한다. 정사로써 안을 […]하고, […]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말미암고, 널리 일어남은 먼 곳에서부터 비롯되니, 멀고 가까움에 기준을 두루 갖추어 마치는 것이다.

이 때 하늘을 초월적인 인격신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때의 하늘은 천명을 뜻할 수도 있고, 제왕을 뜻할 수도 있으며, 이치(理)를 말할 수도 있다. 하늘이 백성을 내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선험적인 도덕률에 의해 모든 것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근본과 말단을 밝힌다'는 것이다. 원래 맑은 하늘은 티끌을 털어내야 희고 푸르지 않으며, 원래 붉은 땅은 어찌 하여도 파랗게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토록 잘 흐트러지는 중심을 과연 선천적인 것, 즉 선천팔괘와 천리(天理)의 보존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현실과 이상은 그 기원이 같지 않다. 둘이 연관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지만 현실이 곧 이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두 기원은 다르지만 둘이 모두 있어야 나아감이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너무 크면 이상만 좇다가 실리를 놓치고, 이상이 없으면 내일 무사히 일어나는 나조차 기대하지 않게 된다. 그런 단순한 것조차 기대하고 대비하지 않는다면 원숭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微補在□□, 分微在明, 明王是以敬微而順分, 分次以知和, 知和以知樂, 知樂以知哀, 哀樂以知慧, 內外以知人.

미미한 것을 보충함은 […]에 있고, 미미한 것을 분별함은 밝음에 있으니, 밝은 왕은 이 때문에 미미한 조짐을 공경하고 분수를 따른다. 차례를 분별함으로써 화합을 알고, 화합을 앎으로써 즐거움을 알며, 즐거움을 앎으로써 슬픔을 알고, 슬픔과 즐거움으로 지혜를 알며, 안과 밖을 살펴 사람을 안다.

실제로 현실의 길흉화복은 매우 사소한 논의나 행동, 더러는 다툼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때의 순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순간을 믿어 버릴 뿐이다. 이 미미한 것을 항상 밝게 분별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사회생활에서도 도모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겉만 보고도 알 수 없고, 속으로도 알 수 없으며, 기쁜 것만 보아서도 알 수 없는 그 미미함을 알고 무엇을 해야 할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사상이나 역학의 종착점이 아닐까.


凡民生而有好有惡, 小得其所好則喜, 大得其所好則樂, 小遭其所惡則憂, 大遭其所惡則哀. 凡民之所好惡, 生物是好, 死物是惡. 民至有好而不讓, 不從其所好, 必犯法無以事上; 民至有惡不讓, 不去其所惡, 必犯法無以事上. 遍行於此, 尙有玩民, 而況曰以可去其惡而得其所好, 民能居乎?

무릇 백성은 나면서부터 좋아함과 싫어함이 있으니, 좋아하는 것을 조금 얻으면 기뻐하고 크게 얻으면 즐거워하며, 싫어하는 것을 조금 겪으면 근심하고 크게 겪으면 슬퍼한다. 백성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는 대개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백성이 좋아하는 데 이르러 사양하지 않으니, 그 좋아하는 바를 따르게 해주지 않으면 반드시 법을 범하여 윗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데 이르러 사양하지 않으니, 그 싫어하는 바를 없애주지 않으면 반드시 법을 범하여 윗사람을 섬기지 못한다. 이러한 법을 두루 행하여도 오히려 법을 가볍게 여기는 백성이 있거늘, 하물며 싫어하는 바를 없애고 좋아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한들 백성이 편히 살 수 있겠는가?

통치자가 법을 바르게 쓴다면 이것은 매우 좋은 방향이다. 하지만 꽤 많은 경우에는 미래를 보아 기쁜 것과 당장 좋은 것이 나뉜다. 이를 맑음(淸)과 탁함(濁)이라고 해 보자. 잘 듣고 여러 번 논한 대로 오래 기쁠 수 있는 것을 추구하기에 권력은 짧고 달콤함은 미미하다. 일단 윤택하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방안을 쓴다면 똑똑한 시민들이 비판할지언정 내 힘은 강해지고 당장의 실적이 있어 달콤함을 얻는다. 예로 선함을 쌓으라고 '적선(積善)'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눈 앞의 이득만 쌓아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적리(積利)'가 되지 않나 우려하는 바이다. 하물며 어리석은 나도 아는 일을 지도자가 애써 외면하려 하면 무엇이 잘 되겠는가.


若不□力, 何以求之? 力爭則力政, 力政則無讓, 無讓則無禮, 無禮, 雖得所好, 民樂乎? 若不樂, 乃所惡也. 凡民不忍好惡, 不能分次, 不次則奪, 奪則戰, 戰則何以養老幼? 何以救痛疾死喪? 何以胥役也? 明王是以極等以斷好惡, 敎民次分, 揚擧力竟, 任壯養老, 長幼有報, 民是以胥役也.

만약 힘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이를 구하겠는가? 힘으로 다투면 힘으로 내리누르게 되고, 힘으로 내리누르면 사양함이 없으며, 사양함이 없으면 예가 없다. 예가 없다면 비록 좋아하는 바를 얻은들 백성이 즐겁겠는가? 만약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곧 싫어하는 바가 된다. 무릇 백성이 호오를 참지 못하고 차례를 나누지 못하면, 차례가 없어 빼앗게 되고, 빼앗으면 싸우게 되니, 싸우면 무엇으로써 늙은이와 어린이를 봉양하며, 고통과 질병, 죽음과 상사를 구제하며, 무엇으로 서로를 부려 일하겠는가? 밝은 왕은 이 때문에 등급을 엄격히 하여 호오를 결단하고, 백성에게 차례와 분수를 가르쳐 다투는 힘을 북돋워 쓰며, 장정을 부리고 노인을 봉양하여 어른과 어린이가 보답을 받게 하니, 백성이 이로써 서로 돕고 일하는 것이다.

구휼은 중요하지만 어떻게 구휼해야 하는가? 나라의 토질이 뒤틀리고 날씨가 바뀌어 쌀 농사가 흉년이 들면, 바뀐 땅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파악하고 이치에 순응하게 하면 상수다. 공매도를 하는 상인들을 쥐고 흔들어 담합을 막으면 중수다. 외세로부터 쌀을 수입해 매년 보급하면 하수다. 이상하게 늘어 가는 각국의 국가 부채, 지원금만 퍼 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람들의 아우성을 본다면 21세기 초반은 적어도 하책을 쓴 것이다.


夫力竟非衆不剋, 衆非和不衆, 和非中不立, 中非禮不愼, 禮非樂不履, 明王是以無樂非人, 無哀非人, 人是以衆. 人衆, 賞多罰少, 政之美也, 罰多賞少, 政之惡也. 罰多則困, 賞少則乏, 乏困無醜, 敎乃不至. 是以民主明醜以長子孫, 子孫習服, 鳥獸仁德, 土宜天時, 百物行治. 治之初𢋙初哉, 治化則順, 是故無順非厲, 長幼成而義生, 曰順極.

무릇 다투는 힘은 무리가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무리는 화합하지 않으면 무리를 이루지 못하며, 화합은 중심이 아니면 서지 못하고, 중심은 예가 아니면 삼가지 못하며, 예는 음악이 아니면 행해지지 못한다. 밝은 왕은 이 때문에 백성의 즐거움이 아니면 즐거워하지 않고, 백성의 슬픔이 아니면 슬퍼하지 않으니, 사람이 이로써 모여든다. 사람이 모여들어 상이 많고 벌이 적으면 정사의 훌륭함이요, 벌이 많고 상이 적으면 정사의 악함이다. 벌이 많으면 곤궁해지고 상이 적으면 결핍되니, 결핍되고 곤궁하면 부끄러움이 없어져 가르침이 이르지 못한다. 이 때문에 백성의 군주는 부끄러움을 밝혀 자손을 기르고, 자손이 익히고 복종하여 새와 짐승까지 덕에 감화되며, 토지의 마땅함과 하늘의 때가 맞아 온갖 사물이 다스려져 운행된다. 다스림의 처음을 바르게 시작하면 교화가 순조로워진다. 그러므로 순조로움치고 엄격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른과 어린이가 제자리를 이루어 의가 생겨나니, 이를 일러 '순조로움의 지극함'이라 한다.

잘 생각하면, 이기기 위해서는 다투어야 한다. 화합하여 무리를 이루고, 무리를 이루어 잘못된 것을 베어 내고 선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다투어야 하고, 다툼은 원망을 불러 온다. 순조롭게 따르고, 모든 것이 윤택하게 계획대로 흘러 간다고 믿으면 당장은 좋고 선해 보인다. 하지만 이겨서 정벌하는 과정에서 산 원한까지도 모두 품어 그 마음이 사그라들게 하기 위해서는 순조롭기 위해서 어떤 계보를 따라 왔으며, 다른 길은 어떤 것이 가능했을지 돌아보아 지음과 쓰임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고민하여야 한다. 많은 경우 쓰임을 이야기하지만, 지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글은 쓴 사람이 곧 지은이이다. 하지만 쓰고 난 글과 지은이를 같다고 할 수 없다. 쓰인 것은 이미 굳었고, 변화는 통제된다. 그러나 그 쓰임의 부모는 언제든 다른 것을 지을 수 있으며, 언제나 다른 것에 덮어쓸 수 있다. 무엇에 어떻게 덮어쓸 수 있으며, 형세가 어떻게 되는지 판단하는 것은 병법의 기초 중의 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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