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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유령

by gg582 · 2026-09-18 05:31:29 · 141 views · 5 min read

그 아무개는 보이는 유령이다.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심장이 뛰고, 말을 하고, 여느 누구처럼 돈을 벌어 본 적도 있다. 옛 동료, 지인, 어느 누구를 찾아가 그에 대해 물어도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끝내 부정한다. 그는 쇠락해 가는 어느 도시의 작은 대학에서 공부하며, 보조원이나 잔심부름을 하며 용돈을 충당하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를 본 사람들은 마을 밖에서도 많았고, 인상착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별다를 것 없는 이의 찌질한 사건들이 어떤 눈덩이를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끽해야 치정극이나 진흙탕 싸움이겠지. 사실 수사해 볼 가치도 느끼지 못했지만, 의뢰금을 받은 이상 우선 처리하지 않으면 부정 청탁으로 골치아픈 고발이 들어오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와 제법 가까웠던 선임을 찾아가 물어보니, 항상 어딘가에서 말끝을 흐리지만 '별나도 또래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학생'이었다고만 한다. 일을 잘하지 못했거나 손이 빠르지 못했다면 얼버무리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주머니에 쑤셔 넣은 오천 원권을 꺼내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제길, 뭐 하는 짓인지..."

날씨도 춥고, 이슬이 맺힌 맥주가 왠지 미지근하게 느껴져서 사뭇 기분이 나빴다.

으레 안 풀리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풀린다지.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고교 시절의 급우를 만났다. 황당하게도 다음 날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갖는다며, 오후 4시 전까지는 탐문을 마쳐 달라니...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악연도 인연이라며 처음에는 그에 대한 말을 아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인 그는 불안한 눈초리로 손톱을 뜯는다. 고장난 오토바이처럼 다리를 달달 떨더니, 살짝 거무튀튀하게 말라붙은 입술을 멋쩍게 씰룩거리며 점차 몇 단어를 터놓는다.

"사실은요, 그놈이 화를 참는 꼴은 본 적이 없어요. 성격도 제법 고약했죠. 변태 기질도 좀 있었죠. 여자에 대한 이상한 환상이 있던 놈이었어요. 자길 아기처럼 여겨 주길 바랐죠." 여기서 들떠서 집요한 질문을 했다간 기회가 날아간다. 잠자코 기회를 노리며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학교 외에 드나들던 장소는 있었습니까?"

떠올리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 남자는 어렵게 말을 열었다. "병원에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정신 분석 연구소 같은 부류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요즘 시대에는 더 거창한 의원이 많은데..."

아쉽게도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기차 시간이 다 되었군요. 좋은 일 하시네요."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육개장 한 그릇을 비우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지역 신문사를 통해 몇 칸의 광고면을 빌려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 가장 큰 결실은 아무개가 다니던 곳이 심리학 연구소도 아니고, 정신분석학에 해박한 어느 의사의 상담소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질병마저 휘장으로 쓰려는 불쌍한 망령인가? 그 길로 나는 다시 몇 가지를 수첩에 적고 고물 승용차의 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상담소의 카운터는 10년, 아니 20년은 더 전에 시간이 멈춘 듯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카운터에 연락처, 이름을 말하니 10분 정도 기다리고는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부드러운 인상에 남부 말씨를 쓰는 의사 하나가 나를 맞이했다. 인상착의와 수첩 속 정보를 내밀어 보이니 의사는 놀라는 기색 없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 환자라면 아마 문제를 일으켜도 이상할 건 없지요. 이런 일이 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의아하게도 자신의 실책이라는 말도 없이, 의사의 행동거지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볼품없는 시골 의사에게 과분한 말이지만, 값싼 정의감이 다음 말을 달려나가게 했다. "자아가 비대한 범행이로군요.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요."

예상과 달리 의사는 일그러짐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렵게 말해 봐야 바쁘신 분 같은데, 쉽게 말하겠습니다. 믿을 수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그 환자에게는 이렇다 할 자아가 없습니다. 대신 남의 행동을 베끼는 데 소질이 있었죠."

사람이라면 무릇 자아가 있어야 무엇인가를 저지를 텐데, 자아도 동기도 없는 범행이라니? 저 의사는 돌팔이인가. 그 뻔뻔한 표정으로 의사는 다음 문장을 생각하려다, 입술만 조금 우물거리더니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들어 보셨지요?" 누구를 바보로 아나. 이 시대에 플라톤은 바보 천치도 아는 이름이다. "동굴 밖의 존재들은 의지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같은 움직임으로 팔다리를 움직이죠. 마찬가지로 이 환자가 살아남겠다는 본능으로 정교하게 사람의 의지를 모방한다면, 우리는 쉽게 알아챌 수 있을까요?"

아직은 헷갈리지만 내가 저 괴짜 의사가 명의인지 돌팔이인지 알아볼 깜냥은 되지 않는가. "동굴 안의 사람은 그림자도 의지가 있다고 믿어 버린다는 거군요?"

의사는 잠자코 있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때는 해의 각도가 바뀌거나, 구름이 끼는 때와 같이 몇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리고 점진적인 변화는 알기 어렵죠."

순간적으로 이 의사는 범인의 수를 아득히 넘긴 명의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내가 동굴 안의 사람 따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었다. 분명 찌질한 돌팔이가 있어 보이는 척 온갖 비유를 끄집어 온 거겠지.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바쁜데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황급히 상담소를 빠져나와서, 어느 길로 차를 몰았는지도 기억할 수 없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의사는 침착했다. 아마추어 만화의 한 장면처럼... 처음부터 내가 올 것을 알았단 것인가?

생각을 털어 버리기 위해서인지 나는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빨래를 널며, 가스불을 켜서 커피를 한 잔 데웠다. 오늘따라 커피는 빠르게 끓어 넘쳐, 텁텁하게 타 버린 맛이 났다. 이래서야 썩은 콩물이지 무슨 커피는 커피인가. 어딘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은 맛대가리 없는 커피 한 잔에 더 들떠 버렸고, 홧김에 배낭의 사건 일지를 파 뒤집어 책상 위에 폈다.

어쨌든 사건 일지를 들춰보아 동태를 살피니, 그의 첫 범행 전엔 엇나간 신학대학 교수처럼 근엄하게 굴더니 이내 2주 만에 싸구려 목걸이를 찬 한량 같은 꼴로 소고기를 훔치다 적발되었다. 둘째 사건도 고작해야 교수와 심하게 다툰 후, 다방에서 늙은 접대원을 추행하다가 발각, 뒤로는 모텔을 전전하며 숨을 돌리다 서점에서 "도덕경"을 훔치려다 발각. 아이러니하게도 내 책장에는 한 달 전부터 보이지 않던 도덕경이 꽂혀 있다니, 굉장한 우연의 일치라고 봐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번 사건도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전 범행 수법부터 목적지까지 신출귀몰하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이 녀석은 나와 같이 검은 구두, 검은 모자를 쓰고 목적지에서 한 잔의 커피부터 마셨다. 그리고 동선이 맞지 않는데도 억지로 커피숍을 찾아 가는 점은 매우 이상하다. 정말로 그 의사의 말대로 이놈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가? 몇 가지 인상착의를 대조해 보면, 눈썹 선까지도 거울 앞의 나를 따라한 듯 같았다. 조금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어쩌면 신문 광고면을 보고 포털 사이트에서 본 걸로, 사실 나를 흉내내고 있는가? 만약 심리도 자아도 없는 놈이 나를 따라하며 범죄자가 되었다면 나는 그를 유령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나의 그림자라고 불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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