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유령

by gg582 · 2026-09-18 05:31:29 · 12 views

그 아무개는 보이는 유령이다.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심장이 뛰고, 말을 하고, 여느 누구처럼 돈을 벌어 본 적도 있다. 옛 동료, 지인, 어느 누구를 찾아가 그에 대해 물어도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끝내 부정한다. 그는 쇠락해 가는 어느 도시의 작은 대학에서 공부하며, 보조원 일을 하며 용돈을 충당하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를 본 사람들은 마을 밖에서도 많았고, 인상착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제법 가까웠던 선임을 찾아가 물어보면, 항상 어딘가에서 말끝을 흐리지만 '별나도 또래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학생'이었다고만 한다. 일을 잘하지 못했거나 손이 빠르지 못했다면 얼버무리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주머니에 쑤셔 넣은 오천 원권을 꺼내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제길, 뭐 하는 짓인지..."

으레 안 풀리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풀린다지.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고교 시절의 급우를 만났다. 악연도 인연이라며 처음에는 그에 대한 말을 아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인 그는 점차 몇 단어를 터놓는다.

"사실은요, 그놈이 화를 참는 꼴은 본 적이 없어요. 성격도 제법 고약했죠. 변태 기질도 좀 있었죠. 여자에 대한 이상한 환상이 있던 놈이었어요. 자길 아기처럼 여겨 주길 바랐죠." 여기서 들떠서 집요한 질문을 했다간 기회가 날아간다. 마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처럼 조각을 모아 보자꾸나. "학교 외에 드나들던 장소는 있었습니까?"

떠올리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 남자는 어렵게 말을 열었다. "병원에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심리 분석 연구소 같은 부류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아쉽게도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기차 시간이 다 되었군요. 좋은 일 하시네요."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육개장 한 그릇을 비우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지역 신문사를 통해 몇 칸의 광고면을 빌려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 가장 큰 결실은 아무개가 다니던 곳이 거창한 곳이 아닌, 정신분석학에 해박한 어느 의사의 상담소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질병마저 휘장으로 쓰려는 불쌍한 망령인가? 그 길로 나는 다시 몇 가지를 수첩에 적고 고물 승용차의 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상담소의 카운터는 10년, 아니 20년은 더 전에 시간이 멈춘 듯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카운터에 연락처, 이름을 말하니 10분 정도 기다리고는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부드러운 인상에 남부 말씨를 쓰는 의사 하나가 나를 맞이했다. 인상착의와 수첩 속 정보를 내밀어 보이니 의사는 놀라는 기색 없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 환자라면 아마 문제를 일으켜도 이상할 건 없지요."

의아하게도 자신의 실책이라는 말도 없이, 의사의 행동거지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볼품없는 시골 의사에게 과분한 말이지만, 값싼 정의감이 다음 말을 달려나가게 했다. "자아가 비대한 범행이로군요.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요."

예상과 달리 의사는 일그러짐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그 환자에게는 이렇다 할 자아가 없습니다. 대신 남의 행동을 베끼는 데 소질이 있었죠."

사람이라면 무릇 자아가 있어야 무엇인가를 저지를 텐데, 자아도 동기도 없는 범행이라니? 저 의사는 돌팔이인가. 그 뻔뻔한 표정으로 의사는 다음 문장을 생각하려다, 입술만 조금 우물거리더니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들어 보셨지요?" 누구를 바보로 아나. 이 시대에 플라톤은 바보 천치도 아는 이름이다. "동굴 밖의 존재들은 의지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같은 움직임으로 팔다리를 움직이죠."

아직은 헷갈리지만 내가 저 괴짜 의사가 명의인지 돌팔이인지 알아볼 깜냥은 되지 않는가. "동굴 안의 사람은 그림자도 의지가 있다고 믿어 버린다는 거군요?" 순간적으로 이 의사는 범인의 수를 아득히 넘긴 명의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내가 동굴 안의 사람 따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바쁜데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황급히 상담소를 빠져나와서, 어느 길로 차를 몰았는지도 기억할 수 없다.

사건 일지를 들춰보아 동태를 살피니, 그의 첫 범행 전엔 엇나간 신학대학 교수처럼 근엄하게 굴더니 이내 2주 만에 싸구려 목걸이를 찬 한량 같은 꼴로 소고기를 훔치다 적발되었다. 둘째 사건도 고작해야 교수와 심하게 다툰 후, 다방에서 늙은 접대원을 추행하다가 발각, 뒤로는 모텔을 전전하며 숨을 돌리다 서점에서 "도덕경"을 훔치려다 발각.

그리고 이번 사건도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전 범행 수법부터 목적지까지 신출귀몰하지 않은가. 정말로 그 의사의 말대로 이놈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가. 만약 심리도 자아도 없는 놈이 고작 범죄자가 되었다면 나는 그를 유령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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