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잔이 얼마나 산미를 잘 살리는지 보자: 에티오피아 알로 시다마 벤사 내추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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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582 · 2026-09-14 05:31:40 · 7 views
Table of contents
여러 번 커피를 마시며 에티오피아 알로 시다마 벤사 내추럴의 시작 노트와 끝 노트 등은 다양한 테이스팅 보울에서 일치함을 느꼈다. 우선 앞선 시음에서 사용했던 빈티지 보울의 시음 결과를 되돌아보자.
기존 보울
미나리--->땅콩-->산딸기->복숭아-->땅콩-->미나리
땅콩과 미나리가 합쳐지면서 끝난다.
이후 잡미를 없애기 위해 한 번 입을 헹궈 준다.
복숭아->미나리->땅콩->복숭아->미나리->복숭아->미나리->복숭아
뒤로 갈수록 미나리와 복숭아가 합쳐져 땅콩이 되고, 초반엔 미나리와 땅콩이 오히려 분리되어진다.
미나리 맛과 복숭아 맛이 섞여서 어떻게 땅콩 맛이 될 수 있는가? 미각적으로 무슨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다.
빛의 합성처럼 일정한 체계를 둬서 적+록=황과 같은 메커니즘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필요하다면 향미만 추출해서 혀에 떨어뜨려 보는 방법이 있겠지만 고가의 추출 장비가 필요하다.
뒤에는 땅콩, 복숭아, 미나리가 아예 합쳐지다가, 복숭아 중심의 맛에 미나리 향이 얹혀 간다.
땅콩은 중반에 끼었다가 빠지고 다시 복숭아로 수렴하여 한 가지 노트로 정리된다.
끝 노트는 복숭아의 신맛.
새로운 보울
최근 커피를 시음하기 전 입을 헹구던 냉수용 보울이 빈티지라고 해도 너무 낡았고, 물은 새지 않아도 이가 빠지거나 살짝 금이 간 부분이 있다 보니 마우스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의 보울을 골동품상에 매각하고, 그 값으로 새로운 커피 잔을 구매하였다. 그래 봐야 기존에도 물잔은 테이스팅 보울로 사용한 이력이 짧고, 적어도 기존 보울을 팔아 치운 것이 아니다.
새 보울 역시 기존 보울과 전반적으로 유사하나, 벽면이 보다 직선적으로 뻗어서 산미가 타고 올라오는 방식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보울의 형태와 흙, 유약을 기록한다.
████ Cool Gray (#A4A4A2 / 164, 164, 162)
████ Warm Gray (#9D998F / 157, 153, 143)
위의 것이 새 보울, 아래의 것이 기존 보울의 색에서 추출한 후 보정하고 중앙값을 추출한 값이다.
다양한 광원 조건에서 현재 보울을 첨부한다. 기존 보울은 앞선 포스트에 있다.
벽면이 각져 있다. 이것을 보아 시음 특성이 다를 수 있다.
굽 쪽의 산화 발색으로 보아서 경상도 쪽 광맥에서 캐서 쓴 흙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어차피 유약으로 덮여 있으니 무관하지만, 공장제 흙이 아님에도 기존 것보다 색이 밝다.
유약의 표면은 기존 잔의 거울처럼 매끈한 내부 처리보다는 조금 못 미친다. 의외로 벽면이 기계적인 유선형이 아니고, 유약을 무난하게 바른 직선형이라는 점이 또 다른 특성을 만들 수도 있다.
첫 번째 추출
브리카 2인분의 정격 용량대로 차가운 물 120ml를 투입한다. 바스켓에 커피를 넣을 때 망가진 말차선을 이용해서 커피를 고르게 펴 가며 넣는다. 남는 원두는 깎아내어 버린다.
종이 필터를 원두 위에 깔되 젖게 하지 않는다.
그 상태 그대로 상단부에 냉수를 120ml 붓는다. 2분쯤 가열하고 해당 냉수를 버리고, 새로운 냉수로 갈아 준다.
괄호를 친 노트들은 모두 동시에 발현된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는 모두 가볍게 커피를 빨아 반 모금이 들어가게 한다.
첫째 모금: 꿀->수삼
대체로 꿀같은 단맛 뒤에 허브향이 따라서 나오는가?
둘째 모금: 복숭아->꿀->와코차
여기서 와코차 맛을 허브로 분류한다면 앞선 가설과 정합성이 있다.
셋째 모금: 복숭아->꿀->산딸기->(미나리 레몬 수삼 쑥)
여기서도 과일의 단맛과 산미가 스친 후 바로 허브로 달려간다. 그러니까 바리스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Fruity->Herbal은 악보에서의 동기같은 작은 단위 중 하나인가?
넷째 모금: 복숭아->땅콩->수삼->꿀->우유
셋째의 허브 향과 넷째의 과일 향이 서로 다른 모금에서 겹쳐져도 견과류 맛이 재현된다. 참 이상한 현상이다. 약배전에서의 견과류 향의 실체는 기름이 아닌 향의 착각이란 말인가?
허브가 바로 꿀이나 우유같은 농밀한 단맛으로 달려간다는 점도 특이하다.
다섯째는 꽤 과감하게 남은 것을 모두 털어 넘기며, 입에서 충분히 굴리고 넘긴다.
다섯째 모금: 꿀->복숭아->레몬->복숭아->꿀->레몬->복숭아->꿀->(레몬 수삼)
복숭아로 후미가 끝나는 듯 했지만 (수삼 쑥 미나리)로 변질되어 노트가 남는다.
피니시는 복숭아에서 허브 향으로 끝나는 형태를 가지며, 다섯째 모금에서 향의 순환이 명확하다.
마신 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오이 향이 치고 빠진다. 대체 왜...?
두 번째 추출
앞선 추출 방법과 같지만, 브리카 4인분을 이용하여 물 200ml를 넣어서 농도를 묽게 가져간다. (정격 용량은 180ml이다.)
첫째, 둘째, 셋째는 모두 가볍게 커피를 빨아 반 모금이 들어가게 한다.
첫째 모금, 둘째 모금: 복숭아맛->수삼맛->땅콩맛
앞선 추출과 달리 과일 맛에서 바로 허브 맛으로 넘어가고, 둘 사이에서 견과류 맛이 도출된다.
강배전의 기름진 견과류 맛과 달리 확실히 맛이 합성된다는 느낌이다. 전문화된 추출기가 없어 실험이 힘들다. 혹시 추출기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특정 성분을 추출하여 실험 바란다.
셋째 모금: 복숭아맛->찔레향->사과맛->수삼맛->땅콩맛->미나리맛
찔레향이 매우 재미있다. 찔레는 영어권 분류로는 아시아계 야생 장미에 속한다. 일부 바리스타의 시음기에 장미향이 있었는데, 찔레향이 비슷한 결을 건드리는 듯하다. 구매한 로스터리 숍 사장님의 말씀을 따라 추출 농도를 묽게 했더니 산딸기향이 아닌 찔레 향으로 발현된다. 이런 것이 체계화가 끝났다니 커피의 세계는 신기하다. 이쪽도 전문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Fruity->Floral->Fruity->Herbal->Nutty->Herbal`을 따른다. 과일 향과 허브 향이 합쳐지면 견과류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인가? 저번 포스트에서도 한 말과 비슷하다.
넷째는 꽤 과감하게 남은 추출액을 털어넣어서 입에서 충분히 굴리고 넘긴다.
넷째 모금: 복숭아맛->사과맛->찔레향->사과맛->귤맛->땅콩맛->미나리맛->레몬맛->미나리맛->귤껍질맛
Fruity->Floral->Citrus->Nutty->Herbal->Citrus->Herbal->Citrus인가? 만약 Floral+Citrus \approx Nutty라면 커피에서 시트러스계 향미는 과일보다 허브 계열에 가까워야 한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시트러스계 과일의 기름이 조향에 쓰이는 것을 보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3-5분 후 (찔레향 귤향 사과맛) 사이의 허브향도 과일향도 아닌 노트가 갑자기 혀를 톡 치고 올라오고 다시 귤껍질맛으로 빠진다.
이것을 뭐라고 분류해야 할 지 모르겠다.
마신 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오이 향이 치고 빠진다. 이번에도 재현된다.
끝노트는 거의 (복숭아, 찔레)가 동시에 겹쳐 난다.
보울이 얼마나 맛을 잘 분해하는가?
기존 보울 대비 순간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달고 신 맛, 그리고 잔 위에서 순식간에 휘발되는 아로마를 매우 잘 잡는다. 방에 물려둔 중저가형 모니터링 스피커에서 LP를 들을 때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고 튀는 소리는 없지만, 헤드폰으로 들으면 튀는 소리가 생기는 대신 강조된 음역을 잘 잡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가장 이상한 것은 향을 가장 잘 가둬야 할 데미타세에서 이런 향들을 느끼기 더 힘들었고, 거의 리뷰가 불가능할 정도로 바디감과 단맛으로 맛이 뒤덮였었다는 점이다.
기존 대비 추출 간의 편차에 따른 향미 구분이 매우 개선되었다. 핵심 노트들의 움직임, 그리고 끝의 오이 향까지 모두 정확하게 재현되었다. 우려와 달리 빈티지 도자기임에도 향을 흡수하거나 방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일부 사람들은 연질 백자나 청자 따위에 커피를 시음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직 사용해 본 적이 없다. 혹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댓글을 남겨 주면 더 좋겠다.
작가 기물을 주문해서 주저앉을까, 뒤틀릴까 노심초사 기다리며 몇십 만원을 소비할 수도 있지만, 무명의 장인이 중고 시장에 팔아 치우고 나도는 이런 기물을 써도 꽤 좋긴 하다. 다만, 골동품상의 무명 기물은 연질 백자라던가, 아니면 분청사기 계열이 자주 섞여 있는데, 말차를 마실 때 좋다는 프리미엄으로 값만 비싸고 커피나 술 따위를 마실 때에 뉘앙스가 나쁘다.
향이 날카롭게 분해되며 단계별로 쌓이는 것은 아마 청주(일본식이 아닌 법적으로 '약주'로 분류되는 그것들)를 마실 때 평가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당장 80년대만 가도 한국은 술 문화권이었고, 주류 매니아들은 미식과 고급 청주에 혈안이 들어 있었다. 아마 시대상을 고려하면 이 잔 역시 그런 의도로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때의 수요는 안캅 등의 이탈리아제 에스프레소 컵과는 또 다른 양상의 경험을 알코올 하나 없이 재현하고 싶다.
추후 여유가 된다면 SCA 커핑 볼을 이용해 평가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아직은 이 잔의 재현성에 대해 더 탐구할 여지가 있다.